1.귀농을 하면서

가. 가남농원에 정착을하고

*. 2005년 5월 28일 창원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지금 현재 살고있는 광양 다압 섬진매화마을 가남농원으로 이사를 하게되었다.

아이들 교육문제로 6년간의 창원생활을 정리한 것이였다.

많은고민 끝에 시골생활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고 막상 시골에와서 무슨일을해야할까하고 생각하니 할만한 일이 없어 고민을 많이 하였다.

조용히 자연을 벗삼아 살아야지하던 생각은 하루 이틀이지 일이 없고는 너무나 지겹고 따분한 나날이였다.

10년전 4000평의 매실을 이미 심어두었던 상태라 여기에서 달리 할수있는 사업이란 매실이 아니고는 달리 아무리 다른것을 찾아봐도 할만한게 없었다.

6월이 되면서 매실수확은 시작되었고 그동안 나무도 관리를하지않아 그동안은 수확을 크게보지 못한 상태였고 귀농을 결심하던 첫해부터 본격적인 매실수확이 시작되었는데 난생처음 남편과 5시에 일어나 아침마다 4000평의 매실밭을 매실 한그루마다 낫으로 풀베기를 해주었는데 하루에 두줄씩 10일을 작업을하면서 서로를 쳐다보면 땀범벅이된 얼굴은 시골농부가 어디 따로있으랴......

첫해 매실수확은 7톤이였고 100% 인터넷 판매를 하면서 고소득을 올렸다.

인터넷 판매의 장점은 높은가격을 받을수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거래는 신용과 믿음 그자체이다.

확실하지않는 제품, 하자가 하나만 눈에 뛰어도 가려내야하며 철저하게 제품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믿어주고 신용이 생기며 자연적으로 거래는 성사된다는점이다.

새벽 5시에일어나 인터넷 주문량만큼 그날 그날 매실을 따서 보내고 정리를하고 마지막 보냈다는 문자까지 보내고나면 보통 밤 12시가 넘었다.

이렇게 한달동안 작업을 하였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이였지만 그 재미또한 말할수가 없었다.

별을보고 아침에 나가면 별을보고 들어왔으니 농사라는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두사람이 그냥 재미있어 열심히 일했고 수확의 보람이 돈으로 바로 직결되니 재미는 더했던 것이다.

한달동안 밖의 세상을 등지고 살았고 그때의 심정을 지금 얘기하면 매실작업을 끝내고 한달만에 쇼핑을갔었다.

백화점안이 딴 세상으로 느껴졌고 시골아이 도시에오면 어리둥절하여 정신을 못차리는 바로 그런 상태였다.

내손으로 일을 해 냈다는 자부심과 농사를 지을수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되었던 동기가 되었다.


나. 야생화에 관심을 갖다.

*. 매실 수확도 끝나고 몸을 추스리면서 생매실 인터넷 판매에 자신감을가지면서 고생해서 농사지어 제값을 못받는 시골사람들이 많이 안타까웠다.

동네 몇몇분들께는 인터넷판매를 하라고 가르쳐주기도 했었고 아무리 얘기해도 나이드신분들은 자신감이 없었다.

그때 가르쳐주었던 농가는 지금 인터넷판매로 농가 소득에 큰 보탬이 되고있다.

그렇게해서 생매실인터넷 판패를하고나니 그다음부터는 인터넷 판매할 제품도 없었고 소득을 올릴만한 작물도없었다.

머리는 쉴새없이 생각을하였고 주변을 살피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농사도 끝냈겠다 모처럼 남편과 여행을 떠났다.

그기서 야생화를 만나게되었다.

아는 지인의 집이였는데 조화를이룬 정원이 나를 완전히 압도해버렸다.

생전 처음보는 야생화며 잔디밭하며 멋진 소나무들이 너무 아름다워 야생화에 정신을 못차리게 되었다.

마음씨 좋으신 아주머니께서 너무 좋아하니까 야생화를 하나씩 떼어내어 박스에 담아주었는데 그때 가져온 야생화가 70종이였다.

그 가치도 몰랐고 무슨 꽃인지 이름도 몰랐으며 가져와서 다음날 심었는데 그때가 7월중순이였는데 한 종류도 죽이지않았으며 다 살아서 그 야생화가 지금 나의 야생화밭의 모태가 된다.

7월의 내리쬐는 ?볕을 가려주었고 매일같이 물을주어 정성껏 살려내니 그 정성은 애기를 키우듯 애지 중지하였다.

번씩을하면 또 떼어내어 밭을만들고 그기서 번씩하면 또 밭을 확장하니 시간이 지나면서 야생화밭이 점점 크져갔다.

항아리 위에다 온갖 풀들을 엊어놓으니 오는사람들마다 한마디씩 할 일없어 저러구있다고 빈정대기도했고 야생화밭을 자꾸 확장해나가니 땅이 남아돌아 고추나 콩을심을뗀데 저 아까운 땅에다 풀을 잔득 심어놓았다고 뒤돌아서 빈정대는 소리도 했었다.

다음해 봄이되면서 야생화는 하나씩 꽃을피워주었고 그 아름다움은 혼자만의 감상시간이였다.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고 첫해는 번씩을 많이하지않아 뛰엄뛰엄있으니까 그냥 풀로만 보이지 꽃으로 보아주는사람들이 없었다.

또 매실수확철이 닥아와 관심을 매실판매에만 쏟다보니 나의 야생밭은 엉망이되어가고 있었다.

매실수확을 끝내고 풀을 멜려고보니 풀인지 꽂인지 구분이 가지않았고 눈만뜨면 풀과의 전쟁을 치러야했다.

어느날은 땅에 주저앉아 펑펑울고싶을때도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남편이 너무 마음이 안되어보였던지 동네 아줌마들을 구해주었다.

1주일간격으로 한달동안 3명의 아줌마들이 풀을 메러왔으며 그렇게해서 야생화밭은 조금씩 만들어져갔다.


다.매실 가공공장을 설립하다.

*. 야생화를 심으면서 마음한구석에는 사업구상을 하고있었다.

생매실 팜매를 하다보니 인터넷판매를 하고나면 좋은상품만 팔게되니 상품이되지않는 매실을 처리하기에 너무 많은 량이 나왔다.

매년후에는 가공을 해야한다는생각은 하고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매실 가공공장을 짓게될줄은 나자신도 몰랐다.

모든 것은 인연따라 하는것이라 생각하고 있던터라 그동안 매실식품에 관심이 많아 항상 집에서 거의 모든음식을 매실을이용해서 만들어 먹었고 그것을 상품화한다고생각하니 별로 어렵게 생각하지않았다.

몇몇사람들의 권유로 뭐 까짓것 한번해보지 하면서 ?>坪?덤벼들었다.

그렇게해서 가공공장을 짓는일에 총력을기울엿고 모든 허가 절차를 밟으면서많은 어려움에 붙디치게 되었다.

모든게 생각처럼 쉬운일이 없을꺼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했던것보다 훨씬 많은돈이 들어가게 되었고 조경이다 식품을 하게되면 매장도 있어야하고 그러다보면 오시는 손님 맞이할 접대공간도 있었야하고 또 볼거리도 있었야된다고 생각하니 그 많은 일을 할려고하니 정말 2년을 눈만뜨면 작업복차려입고 조경감독에다 밥해줄랴 야생화 번식시킬fi 24시간이 모자랄지경이였다.

가을이가는지 겨울이오는지 조차도 잊은채 일을하면서2007. 3. 6일 드디어 가남농원 매실가공공장, 야생화하우스 매장의 문을 열게되었다.

오픈을 앞두고 약간의 사고도있어 병원에 입원도 하였고 날짜는 잡아놓았고 아픈몸으로 퇴원을했고 오픈을하였다.

오픈하여 매화축제를 맞이하니 동내사람들이 제일 많이 놀랐고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수있냐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야생화를 알리는 계기가되었다.

그후 동네 집집마다 야생화를 심는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무도 일하는 아줌마로 바라보지 않았고 니가 농사를 뭘아러 하는 눈빛으로바라보던 동네사람들도 언제 이런기술을 가지고있었느냐고 놀라고 식품을만들어 특허출원까지시키니 다시 한번더 높이 평가를 해주면서도 시기심이 시골분들이 더 많다라는걸 느끼게했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지만 오픈하여 8개월이 된지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고 인터넷판매로 가남농원을 알리는데 주력하고있다.

식품가공 제조업은 아무나 하는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되었고 사명감과 우리의 먹거리를 생각하지않는다면 절대로해서는 아니되는 일이라는것을 절감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 시작한다는 자세로 열심히 오늘도 판로개척에 힘쓰며 매실을 이용한 새로운 신제품 개발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있다.

계속해서 신제품개발에 힘쓸것이며 특히 매실을 이용한 장아찌개발에 주력을하고있으며 매실을 이용한 마지막 한가지 하두를 남겨두고있다.

우리 농촌이 살아야 미래가 있으며 우리먹거리를 지키는일에 혼신의 힘을쏟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