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조용학씨는 젊은 시절 배운 중장비(포클레인) 기사였다. 결혼후 수원에서 조그마한 건설회사에 취업했고,
당시 중동 건설현장 근로자로도 2년간 다녀왔다. 형편이 조금 나아졌고, 무언가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바비큐 사업이었다. 그러나 2년도 안 돼 거덜이 났다.
늦둥이가 태어나자 포클레인 1대를 구입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거리가 많아 형편이 좀 나아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곧 불어닥친 IMF 한파를 넘지 못해 사업을 접어야만 했다.
결국 안주인 김갑남씨가 생계에 나섰다.
젖먹이 아들을 남겨두고 친척 언니와 서울 역삼동을 오가며 야식집을 시작했다.
그러나 고생만 했을 뿐 수중에 남는 게 별로 없었다.
결국 6개월 만에 중단했다. 도시 생활을 청산해야 할 상황이었다.
전셋집을 처분해 빚을 갚고 나니 수중에 남은 것은 단돈 2천만원 뿐이었다.
부부는 고심끝에 낙향을 결심했고 1999년 2월 눈물을 머금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조용학, 김갑남씨 부부는 고향인 상주 화동면 선교리 신의터 재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앞 솔밭단지 문중산 빈터에 우선 100㎡(30평)가량의 2층 황토집을 지었다.
그리고 농사일을 시작했다.
막상 고향에 정착했지만 농사일이 처음이라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다.
남들은 쉽게 하는 논농사조차도 막막했다.
면지역 전체가 전국에서도 유명한 팔음산 포도 생산지라 2천480㎡(750평)를 빌려 포도농사를 시작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철저한 친환경 농사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답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