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농사를 짓겠다고 마음먹고 달려온 지 12년이 훌쩍 넘었다. 괜찮은 직업을 마다하고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아예 호적을 파 가라며 호통을 치셨던 부모님 등 주위의 반대와 만류가 심했다.
지금은 모두들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지만, 그때 그 서운함과 외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나를 힘들게 했다.

1991년 농과대학을 졸업할 즈음 착잡한 마음으로 서울에 갔다가 우연히 선배의 싹기름 채소(무순) 농장을 방문했었다. 60평정도 되어 보이는 비닐하우스 속에는 온통 파란 새싹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농업을 직업으로 선택할지의 여부를 갈등하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과 마음의 평화를 주었다.

-세상에 이런 농업도 있었다니- .

이후 농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즉시 시작했었고 그것이 나의 현실농업의 첫걸음이 되었다.






광주에 내려와 친구들에게 50만 원을 빌려 광주 근교에 있는 20평 남짓한 땅에 비닐하우스를 지어 무순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모든 자재는 아파트나 공사장 등에서 버린 쓰레기를 주워 만들었다. 초라하게 작은 움막 속에서 강아지 한 마리와 생활하면서 그 조그만 비닐하우스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투자-돈은 없었으니 의지와 체력뿐-하였다.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무순농사로 번 하루 매출은 5천원 정도. 한 달에 15만 원에서 20만 원 정도였으니 겨우 기름 값이나 되었을까? 아무튼 돈은 벌지 못했지만 새벽 4시쯤까지 무순을 다듬고 포장한 다음 농산물 공판장에 내다 팔았다. 어릴 적부터 농사일을 했지만 농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하면서 배워나가자는 생각으로 무조건 일을 하기시작 했습니다.

그 이후 일이 조금씩 늘어갈 무렵 역시 시련은 찾아왔다. 아마도 그때가 설날쯤인 것 같다.

모처럼 설날이라고 고향집에 다녀오기 위해서 며칠 자리를 비운 틈에 난데없는 폭설로 유일한 내 삶의 터전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이 일 이후로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기력조차 잃어버린 채 한동안 잠적해서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지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두 명의 대학친구들과 함께 900여 평의 하우스를 지었다. 어렵사리 지은 비닐하우스에 정성 들여 씨를 뿌리고 채소 등의 채소를 키웠다. 채소들이 무럭무럭 커갈수록 우리들의 기대도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런데 그 해 첫 수확을 눈앞에 둔 어느 겨울날, 탐스럽게 잘 자라던 채소 위로 성난 바람과 눈보라가 덮치면서 의욕과 패기로 시작했던 나의 두 번째 농업은 또 한번 쓴잔을 마시게 되었다. 너무 힘들어 친구들은 그만두게 되었고, 나 또한 포기할까 망설이다가 대학 후배들의 젊은 힘이 모이면서 본격적인 '학사농장'의 뼈대가 잡혀지기 시작했다.







시련 앞에 나의 미래를 무릎꿇게 할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련한 자금으로 우선 2천여 평의 땅을 임대하여 비닐하우스를 짓기 시작했다. 그 비닐하우스에서 상추, 고추, 오이, 치커리, 청경채, 레드치커리, 비트, 케일, 신선초 등 생소한 20-30종의 각종 쌈용이나 샐러드로 인기가 좋은 엽채류를 생산하기로 했다.

영농경험은 비록 부족했지만, 남들과 다른 작물을 재배하고 품질을 차별화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농산물을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생산하고, 유통과정을 변화시켜 소비자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화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계획을 차근차근 수립하게 되었고 이렇게 하여 학사농장이 생겨난 것이다.








누군가 학사농장의 자랑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첫째, 농촌에 젊은이들이 들어와 일하면서 침체 일로의 농촌에 활기와 새로운 문화를 불어넣었다.

둘째, 청소년과 도시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농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여 농업과 환경에 대해 글이나 매체를 통한 피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피부 가까이서 직접 호흡하고 느낄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셋째, 식탁 위를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유기농산물로 바꾸는데 작은 역할을 했다고 얘기하고 싶다.





무일푼, 땅 한 평 없이 시작하여

농업에 대한 신념과 희망으로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우리 학사농장의 갈 길은 아직 멀다.

모든 깨끗한 먹거리를 해결 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젊은이들이 돌아와 함께 할 수 있는,

모두에게 상쾌한 자연과 정직한 마음과 아름다운 평화를 줄 수 있는 곳,

어린 시절 시골 추억과 한국 농업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곳,

그런 곳을 꼭 만들고 싶다